ⓒ시사IN 이명익 전주 남부시장 2층 ‘청년몰’을 운명하는 ‘청년 사장님’들. 칵테일부터 보드게임방까지 품목도 다양하다. |
고작 일주일이다. 국토대장정은 방학을 맞은 대학생에게 양보하자. 왔다 갔다 절반을 비행기에서 보내는 해외여행은 마음의 위안은 줄지 몰라도 신체적 평온을 담보할 수 없다. 그래서 뒤져봤다. 일주일 휴가, 각오하지 않아도 훌쩍 떠날 수 있는 곳. 대자연의 휴양림은 아니더라도 호젓하게 마음 추스를 수 있을 만한 여행지는 없을까. 발견한 키워드는 '오래된 마을과 놀이'. 휴가지라기에는 좀 소박하다. 대신 수십 년 간직해온 이야기와 한데 어울릴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낭만 바캉스, 마을 투어로 안내한다.
전주 남부시장 청년몰
뭐든 켜켜이 쌓여 있는 곳. 그릇도, 건어물과 이불도 키가 껑충, 몇 평 안 되는 점포에 '예술적'으로 쌓여 있다. 1930년대 지금의 규모를 갖춘 전북 전주시 완산구 전동의 남부시장. 세월이 쌓아올린 시장의 풍경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1만6997㎡(약 5140평)짜리 전통시장은 이제 찾아보기 힘든 그림이다.
지난 5월부터 남부시장 2층에 새 점포 12개가 문을 열었다. 원래 2층은 시장 상인을 상대로 하는 백반집 1~2개를 제외하곤 폐허처럼 방치되었던 곳이다. 인적 드물던 이곳에 특색 있는 가게가 들어섰다. 주인은 모두 20~30대이다. 그래서 이름은 '청년몰'. 790여 개 점포가 빼곡히 들어선 1층과 달리 아기자기하다. 좀 더 호젓한 분위기다.
장사 품목도 다르다. '차가운 새벽'은 칵테일 바로, 주인장이 칵테일도 만들고 손님의 고민도 들어준다. '같이 놀다 가게'는 전주에서 하나밖에 없는 보드게임방. 시원한 맥주와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다. 식충식물만 판매하는 '범이네 식충이'도 인기 매장이다. 이 밖에도 '카페나비', 재활용 디자인 용품을 파는 '나는 나', 잡화점 '미스터리 상회', 볶음요리 전문점 '더 플라잉팬', 직접 농사지은 뽕나무로 햄버거 등을 만드는 '뽕의 도리'까지 다양하다.
전주 지역에서 문화 기획을 하는 사회적 기업 '이음'이 남부시장을 들락날락한 지 어언 8년이다. 그간 시장의 위트 있는 간판과 하늘정원(옥상 쉼터)을 만들며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김병수 대표는 젊은 친구들이 시장에서 왁자지껄 떠드는 모습을 보고 '청년 장사꾼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활기를 잃은 전통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청년으로 이루어진 점포를 운영하기로 한 것. 3월에 모집해 5월 문을 열기까지, 사장들이 직접 폐자재를 모아 페인트칠과 못질을 해 가게를 뚝딱 완성했다.
식충식물을 파는 정대범 사장은 남부시장 상인회에서 일하다 프로젝트를 알고 점포를 신청했다. 취미로 키우던 식충식물을 사업 아이템으로 잡은 그는 "장사는 처음인데 경험 삼아 할 만하다. 아이들이 많이 찾는데 식충식물의 매력을 어른보다 잘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지역 사람뿐만 아니라 전주에 여행을 온 사람들도 자주 들른다. 블로그 글을 보고 들렀다는 박시영씨는 "특색 있고 이색적이다. 식당치고는 가게가 좀 좁긴 하지만 가격도 시장이라 매우 저렴하다"라고 말했다.
매월 첫째ㆍ셋째 주 토요일에는 야시장이 열린다. 전주를 '지역 기반으로 하는' 인디밴드 공연이나 문화행사가 펼쳐진다. 둘째ㆍ넷째 주에는 상인들이 마련한 파티가 준비되어 있다. 상인들의 아카펠라 취미를 엿볼 수도 있고 요리ㆍ식물 관찰 등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청년몰을 기획한 이음의 이승미씨는 "시장과 동떨어지지 않은 공간으로 꾸리고 싶었다. 젊은 사람들을 유입해 남부시장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청년몰 사장들은 하나의 공동체다. 식당 주인끼리 달걀을 꿔주고 밥을 같이 먹고 테이블을 나눠 쓰며 시장과 자신의 미래를 가늠해본다.
ⓒ감자꽃스튜디오 제공 평창의 폐교에서 열린 문화예술 교육캠프 |
전주 한옥마을과 전동성당에서 10여 분 거리. 전주 여행을 계획한다면 꼭 한번 들를 만하다. 특히 토요일 밤을 권한다. 시장의 백반집은 낮에는 밥을 팔지만 밤에는 막걸리를 판다. 안주가 우수한 편. 청년몰을 찾느라 길을 잃어도 그만이다. 십자로팻션, 한국닭집, 풍년그릇마트, 튀밥집 등 구석구석 숨은 생활의 달인을 구경하면 된다.
인천 배다리 마을
서울 용산에서 급행을 타면 30여 분. 그 간격이 큰 차이를 빚었다. 동인천역 4번 출구에 서면 서울과 전혀 다른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일단 압도하는 건물이 없다. 고만고만한 3~4층 건물과 중앙시장을 차례로 지나면 배다리 마을이 나온다. 예전에 있던 다리 이름에서 따온 이름이다.
배다리 마을의 시작을 알리는 건 헌책방 아벨서점이다. 한미서점, 삼성서림 등 오래된 헌책방이 모인 거리의 초입에 있다. 아벨서점의 '시 다락방'에서는 매월 한 번 시낭독회가 열린다. 바로 옆 포토갤러리 배다리는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운영한다. 오래된 우신양복점은 거리의 운치를 더한다. 마을 곳곳에 도배된 벽화도 명물. 언제든 와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여기까지.
2007년 배다리의 옛 양조장 건물에 터를 잡은 대안 문화공간 '스페이스빔'은 올여름 도시 캠핑 프로그램 '배다리 밭캉스'를 준비 중이다. 산이나 바다, 혹은 해외로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일상 공간인 동네에 머물기 위한 캠핑 프로그램이다. 어디 멀리 떠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리다.
지난해는 인천 지역 작가들로 구성된 3개 팀이 인근에서 캠핑을 진행했다. 함께 놀 아이템을 마련해 누구든 캠핑 장소를 방문할 수 있게 했다. 30분 거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집을 두고 폭우 속 텐트에서 고립감을 느껴보기도 했다. 이번에는 신청 대상을 늘렸다. 가족이나 친구 등 단체면 신청이 가능하다. 스페이스빔에서 텐트를 나눠준다. 8월17일부터 2박3일간이다.
캠핑 장소는 이름처럼 밭이다. 인천시는 2010년 인천 동구 금창동 등에 송도-청라를 잇는 산업도로를 만들기 위해 주택을 철거했다가 환경과 소음 문제로 주민 반대가 심해지자 공사를 중단했다. 배다리를 지나는 산업도로 용지는 길이 약 100m에 폭 50m 사다리꼴 모양이다. 버려진 터는 텃밭이 되었다. 일부는 주차장으로 쓰인다. 캠핑장은 이곳에 차려진다. 민운기 스페이스빔 대표는 "(용지를) 자연생태와 마을 공동체의 복원을 꿈꾸는 상징적 장소로 만들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캠핑을 전후한 7월과 8월 사이 국제 레지던시 프로그램 '나이트워커스 인 인천(NIGHT WALKERS in Incheon)'도 준비되어 있다. 네덜란드의 도시 연구 공간 '엑스포디엄(Expodium)' 관계자들이 방문해 밤에 도시를 산책할 예정이다. 변화하는 도시 지역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체험해 그걸 전시 형태로 발표한다. 일반 사람 누구나 배다리의 밤을 함께 느껴볼 수 있다.
배다리 마을엔 게스트하우스도 있다. '달이네'는 책방이자 놀이터ㆍ공방ㆍ식당 구실을 하는 종합 문화공간으로 숙박이 가능하다. 마을 사진관 '다행' 등 작은 단위의 문화예술 공간이 배다리 일대에 즐비하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5시. 우각로에서는 재활용 벼룩장터와 프리마켓이 열린다. 배다리에서 다시 동인천역으로 가는 길, 정말 달동네 끝자락에 위치한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도 관람을 권한다. 일제강점기부터 자리했던 인근 달동네 주민들이 직접 기증한 물품도 볼 수 있다. 다만 한 가지, 장마철 평일 오후에는 사람이 적어 혼자면 조금 무서울 수도 있다.
ⓒ시사IN 이명익 인천 배다리 마을에 있는 창영초등학교 담벼락에 벽화가 그려져 있다. |
장항 선셋 페스티벌
한눈에 봐도 몹시 낡았다. 긴 목에 읍이 생겼다 해서 장항(長項)이라 불리는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항구에 버려진 일제강점기 미곡 창고, 대한통운 창고, 어망공장 건물이 아트페어나 비엔날레처럼 전시 부스로 탈바꿈했다. 일몰 풍경이 좋은 장항. 북적이던 옛 항구 특유의 색감이 간만에 빛을 보는 자리, 장항 선셋 페스티벌이다.
7월13~22일 버려진 창고에 마련되는 '공장 미술제'에는 청년작가 150여 명이 참여한다. 회화ㆍ조각ㆍ설치작품 등 종류가 다양하다. 창고라 천장이 높아서 규모가 큰 작품도 설치하기 쉽다. '15금 퍼포먼스'(모든 퍼포먼스는 15분을 넘길 수 없다)도 볼거리. 서울 홍대 앞 뮤지션 100여 명이 장항 부둣가, 창고(공장)에서 벌이는 공연도 준비되어 있다. 사회생활에 지친 직장인의 구미를 당기는 건 힐링 프로그램이다. 인도 요가의 일종인 그림 작업, 스트레칭 걷기 명상, 타로카드 상담 등이 있다. 홍대 앞 클럽데이를 만들었던 '지역 재생 전문가' 최정한씨는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에서 가장 트렌디하고 현대적인 예술 축제를 마련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가족 단위 방문객을 위한 미디어아트 스쿨도 있다. 1박2일간 머물며 미디어 체험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축제 이후에도 미술제는 계속된다. 인구 1만3000여 명의 조용한 동네, 어르신이 대부분인 마을 분위기가 어떻게 달라질지 궁금하다.
평창 감자꽃스튜디오
이번엔 폐교다. 강원도 평창군 평창읍 이곡리의 감자꽃스튜디오. 2002년부터 문화기획자 이선철씨가 오래된 폐교(노산분교)를 임대해 쓰다 평창군이 매입한 뒤 문화공간으로 리모델링했다. 1층 노산분교박물관에는 건물의 옛 모습인 노산분교 시절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지역과 관련된 책이 있는 북카페도 열려 있다. 7월29~30일 이틀간 이곳에서 감자꽃분교캠프가 진행된다. 아동 정서 발달을 위한 미술 교육이다. 소리와 움직임을 통한 문화예술 교육 캠프도 준비되어 있다.
평창엔 감자꽃스튜디오 말고도 폐교가 많다. 모두 예술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옛 덕거초등학교엔 덕거예술인촌이 들어섰다. 운동장의 달빛극장에서 연극이 상연된다. 대관령면 수하리 폐교에는 수하산문화학교가 있다. 국악도 배우고 평창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평창과는 좀 떨어졌지만 화천 폐교에서도 '텃밭 예술제'가 열린다. 화천을 기반으로 한 공연 창작 집단 '뛰다'와 전통 연희와 탈춤을 하는 'The 광대' 등이 7월 한 달, 주말마다 화천읍 신읍리에서 공연을 벌인다. 멀지 않은 곳에 화천 딴산유원지가 있어 물에 발 담그고 놀기 좋다. 폐교를 문화 근거지로 하는 마을의 특징은 동네 자체가 소박하다는 점. 한적한 오후의 산책에 제격이다.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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