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9일 수요일

먹기 위해 오늘도 떠난다







[한겨레] [매거진 esc] 요리여행자 신예희씨가 잊지 못하는 전세계 별미들

신토불이! 한식은 우리 식재료로 만든 것을 우리 땅에서 먹을 때 제일 맛있다. 굳이 이집트나 프랑스까지 가서 한식당을 찾을 이유가 없다. 여행지에서는 현지의 신토불이인 그 나라 음식이 최고다. 그들과 같은 밥을 먹고 같은 똥을 싸고 나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어느 나라의 어떤 음식이 제일 맛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대답하기 참 어렵다. 터키 케밥을 손에 꼽자니 스페인의 소꼬리찜이 마음에 걸리고, 타이의 파파야 샐러드를 추천하자니 불가리아에서 먹은 양의 간 볶음밥도 눈에 밟힌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 모든 음식의 기억을 더듬어 한 상에 풀코스로 소개하련다.

코스의 시작은 우선 따뜻한 수프, 말레이시아의 ‘박쿳테’다. 긴 무더위와 장마, 태풍에 지친 요즘 더 간절하다. 박쿳테는 말레이시아의 주석광산과 고무농장에 일하러 왔다가 습하고 더운 날씨에 지친 중국인 노동자들이 개발한 음식이다. 이슬람교 신자인 말레이인들이 먹지 않고 버려둔 값싼 돼지고기와 뼈를 모아 온갖 약재를 넣어 푹 우려낸 탕이다. 한입 뜨는 순간 ‘어흐흐’ 소리가 절로 나는 진국이다. 다음은 샐러드 차례다.

신선한 현지음식

즐기지 못하면

반쪽짜리 여행


불가리아의 국민 샐러드인 ‘숍스카’는 상큼한 맛이다. 토마토와 오이, 양파를 깍둑 썰어 담고 그 위에 포슬포슬한 흰색 치즈인 ‘시레네’를 눈 덮인 산처럼 북북 갈아 듬뿍 올린 다음 올리브기름을 휙 두르면 끝이다. 무척 만들기 쉽다. 하지만 채소들의 맛이 어찌나 끝내주는지 다른 곳에선 절대로 흉내 내기 어려워 보였다. 좋은 재료는 역시 그 자체로 훌륭한 음식이다.

전채요리로는 뭐가 좋을지 딱히 고민할 필요가 없다. 터키의 ‘메제’가 있다. 세계 3대 요리로도 꼽히는 터키 요리는 그 종류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아담한 동네의 조그마한 식당 어느 곳에 들어가도 최소한 열댓 가지 이상의 메제가 있을 정도다. 오래전 한 술탄이 궁정 요리사를 불러놓고는 “이제부터 내가 먹어본 적이 있는 음식을 또 가져오면 네 목을 칠 테다” 겁을 주어 생겼다는 설이 내려온다. 하지만 덕분에 이처럼 다채로운 음식이 탄생했으니 요리사님의 노고에 박수를 보낼밖에! 턱을 괸 채로 저 외국 여자가 우리 음식 잘 먹나 빤히 바라보는 시선은 보너스다. 슬그머니 다가와 아예 앞자리에 앉아 몇 살이냐,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결혼은 했냐, 나도 총각이다 하며 수작을 걸어오기도 한다. 밉지 않고 싫지 않은 관심이다.

슬슬 메인요리인 고기를 뜯어볼까? 나라마다 문화마다 먹는 고기가 다르다. 종교와 문화의 차이로 인해 각자 다른 금기가 있다. 힌두교 신자들은 쇠고기를 금한다. 이슬람교 신자들은 돼지고기를 입에도 대지 않는다. 이 동네는 소를 먹지 않고 저 동네는 돼지가 질색이라니 모두가 행복해질 방법은 없는 걸까? 있다. 바로 닭고기다.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의 재래시장인 푸드마켓에서 꿱꿱거리며 울부짖는 닭의 목을 커다란 식칼로 따서 잡는 모습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처음 보는 모습, 불그죽죽한 핏물 가득한 풍경에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동안 내가 먹어온 닭, 소, 돼지, 온갖 생선들도 이런 과정을 거쳤을 거라 생각하면 못 받아들일 것도 없었다.

닭을 잡던 한 아저씨는 아예 나를 위해 열심히 설명까지 해줬다. 털은 이렇게 뽑고, 내장은 또 이렇게 제거하고, 이 기계는 어떤 역할을 한다는 둥. 아저씨의 눈이 자부심으로 반짝반짝 빛난다. 양고기도 대안이다. 거대한 중국 대륙의 서쪽 끝에 위치한 카스에서는 여행 내내 양고기만 줄곧 먹었더랬다. 구운 양, 볶은 양, 데친 양, 삶은 양, 양 통구이, 양 꼬치, 양 내장 순대, 양 머리 국 등. 온몸에 양 냄새가 배었었다.

남미 벨리즈 라이스 앤 빈스

불가리아 찌개 카바르마

한국음식 향수병 달래주네


한국인은 역시 밥심으로 산다고 메인요리를 즐기고 나면 어딘가 허전해서 밥과 찌개를 찾게 된다. 중남미의 아담한 신생 독립국 벨리즈의 주식인 ‘라이스 앤 빈스’가 저절로 떠오르는 대목이다. 이름만 들어선 쌀과 콩, 즉 콩밥 같지만 이것은 실은 레드빈, 즉 팥이다. 코코넛 밀크를 넣어서 지은 팥밥이라 기름지고 고소한 게 입에 착착 붙는다. 여기에 불가리아의 찌개 ‘카바르마’ 한 냄비면 궁합이 딱 맞는다. 도자기 냄비에다 채소와 고기, 달걀, 치즈 등 다양한 재료를 입맛대로 넣고 약한 불에서 뭉근히 끓여 익힌 음식인데 매콤한 고추와 토마토가 들어가 한입 맛을 보면 입에 착 붙고 속도 풀린다. 김치찌개 한 가지에도 참치, 돼지 목살, 스팸, 고춧가루, 양파를 넣느냐 빼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변주가 가능하듯 카바르마 역시 집집마다 각자의 고유 레시피가 있다.


입가심으로 새큼한 요구르트가 떠오른다. 요구르트 하면 역시 불가리아다. 하지만 터키 사람들이 툴툴거린다. 두 나라는 서로 원조 다툼 중이다. 500년 가까이 터키의 지배를 받았던 불가리아 사람들은 터키인이 요구르트를 훔쳐갔다 주장하고, 반대로 터키인은 자신들이 가르쳐줬다고 주장한다. 특유의 시큼한 맛이 고기의 누린내를 잡아주면서 맛을 끌어올리는 기특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고기요리의 소스로도 최고다. 한편 이 몽글몽글한, 흡사 순두부 같은 요구르트에 차가운 물을 적당히 섞은 뒤 소금과 후추, 다진 마늘, 채 썬 오이, 다진 호두를 넣고 올리브기름을 휙 두른 뒤 싱싱한 허브를 잘게 썰어 흩뿌려주면 여름철의 차가운 수프인 ‘타라토르’가 된다. 더위를 쫓기 위해 먹는 불가리아 전통 음식이다.

이제 차 한 잔과 달콤한 디저트로 마무리할 차례다. 스페인의 ‘카페 콘 레체’나 터키의 ‘차이’가 딱이다. 중독성 강하고 맛 좋은 음료다. 여기에 말레이시아의 전통 디저트 ‘쿠이’를 곁들이면 더 맛나다. 약과, 강정, 유과 같은 우리 전통 한과처럼 역사가 긴 음식이다. 찹쌀과 기름, 설탕이 주재료라 얼핏 한과와 비슷한 맛이지만 설탕 대신 코코넛 꽃에서 추출한 팜 슈거를 사용해 특유의 진하고 걸쭉한 풍미가 근사하다. 그뿐인가? 팜 슈거를 녹인 시럽과 코코넛 밀크를 듬뿍 뿌린 말레이시아의 빙수 ‘첸돌’도 기막히다.

약도 없고 답도 없는 병이 여행병이라고 했다. 하지만 다시 짐을 싸는 이유는 여행지에서 만나는 별난 음식 때문이다.

글·사진 신예희 <여행자의 밥>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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