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22일 수요일

역사와의 말없는 대화 고샅고샅 고즈넉하다… 영주 소백산자락길 제1코스







계구곡(竹溪九曲)은 소백산 국망봉에서 발원한 죽계천이 ‘선비의 고장’에서 빚은 아홉 폭 두루마리 산수화나 다름없다. 조선 명종 때 퇴계 이황이 중국 송나라 유학자인 주희의 무이구곡을 본 따 명명한 경북 영주 순흥면의 죽계구곡은 고려 문장가 안축이 지은 ‘죽계별곡’의 배경지로도 유명하다.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 탐방로’이자 2011년 ‘한국관광의 별’을 수상한 소백산자락길 중 제1코스는 이 죽계천을 거슬러 오른다. 출발점은 전통한옥 체험시설로 올해 ‘한국관광의 별’을 수상한 영주선비촌. 이웃한 소수서원의 고즈넉한 풍경과 어우러져 조선시대를 연출한다.

아름드리 적송 숲에 둘러싸인 소수서원의 전신은 백운동서원. 풍기군수 주세붕이 동방 성리학의 비조로 추앙받는 순흥 출신 학자 안향을 기리고 유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1541년에 설립했다. 백운동서원은 훗날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가 명종으로부터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받음으로써 우리나라 사액서원의 효시가 돼 인재를 4000명이나 배출했다.

퇴계는 소수서원의 취한대(제1곡)에서 죽계천을 거슬러 오르며 금성반석(제2곡), 백우담(제3곡), 이화동(제4곡), 목욕담(제5곡), 청련동애(제6곡), 용추비폭(제7곡), 금당반석(제8곡), 중봉합류(제9곡)를 죽계구곡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홍수로 일부가 유실되자 영조 때 순흥부사 신필하가 초암사 앞 금당반석(제1곡)에서 삼괴정 앞 이화동(제9곡)까지 2㎞ 물길을 따라 내려오며 다시 이름을 붙였다.

취한대(翠寒臺)는 시원한 물빛에 취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으로 소수서원 맞은편의 경자바위 일대를 말한다. 경자바위에 새겨진 붉은색의 ‘경(敬)’은 경천애인의 머리글자로 주세붕이 직접 써서 새겼다고 전해진다. ‘경(敬)’자 위에 새겨진 하얀색 ‘백운동(白雲洞)’은 퇴계의 글씨.

기와집과 초가집이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선비촌에서 신발끈을 조이면 이내 청다리로 불리는 제월교를 건넌다. 지금은 시멘트다리로 변했지만 청다리는 우는 아이 주워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던 젊은 유생들이 기생을 불러 풍류를 즐기다 아이를 낳으면 서로 기를 형편이 못돼 이곳에 버렸다고 한다.

제월교를 건너 마을로 들어서면 단종 복위운동에 연루돼 순흥에 유배됐다 살해된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을 모신 금성단이 쓸쓸한 표정으로 맞는다. 금성대군은 이곳에서 순흥부사 이보흠과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돼 세조로부터 죽음을 당하고 순흥부는 폐부되는 아픔을 겪는다.

금성대군의 죽음을 지켜본 증인은 수령 1200년의 은행나무. 잎사귀 모양이 오리발을 닮아 압각수(鴨脚樹)로 불리는 은행나무는 고을이 폐부될 때 스스로 고사했다가 200년 후 순흥부가 복권되자 되살아났다고 한다. 그때의 아픔을 기억하는 듯 순흥의 매미들이 목청 높여 서럽게 운다.

순흥향교를 뒤로하고 마을을 벗어나자 사과나무 과수원이 가없이 펼쳐진다. 수줍음 타는 시골처녀 얼굴처럼 발그레한 사과는 전국 생산량의 14%를 차지하는 영주 특산물. 기하학적으로 뻗은 굵은 가지에 수십 개의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모양새가 하늘을 떠받치는 소백산처럼 기운차다.

순흥저수지 옆 아스팔트길이 지루하게 이어지던 소백산자락길은 600년생 느티나무 세 그루가 다정한 배점마을의 삼괴정을 만난다. ‘배점’은 배순의 무쇠점(대장간)이 있던 마을이라는 뜻. 대장장이 배순은 틈날 때마다 소수서원을 찾아 퇴계의 강의를 문밖에서 들었다고 한다.

소백산자락길은 순흥초등학교 배점분교에서 죽계구곡을 끼고 초암사를 향한다. 차 한 대 지나갈 정도로 좁은 시멘트길 옆으로 사과밭이 펼쳐지고 죽계천은 수풀에 둘러싸여 물 흐르는 소리만 요란하다. 안내판이 없어 길손 눈에는 죽계구곡이 보이지도 않지만 언뜻언뜻 드러나는 죽계천이 모두 절경이라 굳이 찾을 이유도 없다.

죽계천은 의상대사가 부석사 터를 보러 다닐 때 초막을 짓고 살았던 터라고 전해지는 초암사 앞에서 절정을 이룬다. 너무 푸르러 검은 계곡을 흐르는 하얀 계류는 푸른 이끼로 단장한 바위를 넘을 때마다 우레 같은 소리를 내고 바위를 휘감은 돌단풍은 물소리에 놀라 파르르 몸을 떤다.

초암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소백산자락길은 한여름에도 햇빛 한 점 스며들지 않는 나무터널 속으로 스며든다. 기하학적 곡선의 다래나무가 허공을 수놓은 자락길은 이내 두 갈래 길을 만난다. 오른쪽 길은 석륜암터를 거쳐 국망봉에 오르는 등산로로 퇴계가 1549년 4월에 ‘유소백산록’을 쓰기 위해 올랐던 길이다.

왼쪽 길은 달밭골을 거쳐 소백산 주봉인 비로봉에 오르는 산길로, 자락길은 호젓한 숲을 걸어 비로봉으로 오르는 고갯마루인 성재를 넘는다. 달밭골은 국토순례를 하던 신라 화랑들이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며 유오산수(遊娛山水) 하던 곳으로 6·25전쟁 때 북한에서 피란 온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며 살았던 삶의 터전. 달밭골의 ‘달’은 산의 고어로, ‘달밭’은 산에 있는 다락밭을 뜻한다.

달밭골 성재에서 잠시 다리쉼을 한 자락길은 아름드리 잣나무가 우거진 숲길을 선비처럼 휘적휘적 걸어 화전민이 살던 집을 만난다. 산골민박 주인 김진선(51)씨도 화전민의 후손. 이 집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김씨는 8년 전 서울에서 귀향해 살아가고 있다. 도산12곡에서 따온 ‘만고상청루’ 평상에 달아놓은 ‘자유의 종’은 40여 년 전 달밭골 화전민들을 불러 모을 때 치던 종으로 요즘은 산행객들의 차지. 달밭골 성재에서 화전민의 집과 비로사를 거쳐 종착지인 삼가리 야영장까지는 1.8㎞. 비로봉에서 발원한 계곡이 죽계천 못지않은 절경으로 하산하는 발길을 붙잡는다.

영주=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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