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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시티의 스페인 레스토랑 ‘콜롬비아’ 전경. |
‘미국 역사 속 10대 도시 중 하나’. 플로리다주 이보시티(Ybor City) 안내서 첫 장에 등장하는 문구다. 236년의 미국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유서 깊은(?)’ 도시라는 것이다. 10대 도시 선정이 미국 도시계획협의회(www.planning.org)의 권위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여기다 어설픈 이견(異見)을 달기는 어렵다. 역사 속의 도시라는 것이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시가의 도시
이보시티로 가는 ‘복잡한’ 길은 110달러짜리 내비게이션 기기 하나로 손쉽게 해결했다. 놀이동산 디즈니랜드 왕국이 있는 올랜도에서 자동차로 1시간10분 만에 도착했다. 첫눈에 뉴욕 맨해튼 외곽의 풍경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행인도 거의 없고, 높은 천장에다 사각형의 큰 단층 건물들이 창고처럼 늘어서 있다.
첨단 내비게이션이 실수를 했는가 싶어,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사람을 붙잡아 길을 물어봤다. “이보 중심가가 한 블록 뒤에 있다.” 유서 깊은 도시 이보시티의 대부분이 7번가에 몰려 있다는 것을 안 것은 이후 3시간쯤 뒤이다. 이보는 시티라 불리기는 하지만, 길이가 500m 정도인 7번가 도로 주변 시설이 전부이다. 초미니 도시다. 바다에 가까운 6번가와 5번가에도 건물이 들어서 있지만, 미국 10대 도시로 선정된 이유는 이보 7번가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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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시티의 중심가인 7번가 |
한 블록 넘어서자 큰 키의 야자수를 배경으로 한 이국적 풍경이 펼쳐졌다. 서부영화에서나 만날 수 있는 건물들이 가득 찬, 황야의 뉴타운 같다. 아스팔트 도로를 대신해 말 발굽으로 엉망이 된 진흙탕 길이 더 어울릴 듯하다. 7번가는 크게 세 가지 부류의 비즈니스 권역으로 나눌 수 있다. 알코올과 음료를 파는 카페나 댄싱 클럽, 토속적인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 눈앞에서 만들어주는 시가 전문점이다. 커피 가게나 골동품 가게도 있지만, 대체로 세 부류로 나누면 된다.
시가공장 사장이 스페인 출신
시가 전문점은 어디를 가도 기네스북에 오른 ‘이보의 신기록 증명서’를 달고 있다. ‘2009년 11월 21일 달성한 세계에서 가장 긴 시가:59.82m’. 30여명이 달려들어 만들었다는 세계 최장(最長)의 시가가 이보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보의 역사에서 시가는 절대적 의미를 갖고 있다. 도시 이름 이보 역시 스페인 출신의 시가 제조업체 사장인 ‘빈센트 말티네제 이보(Vicente Martinez Ybor)’에서 따왔다. 1886년 이보에 시가 공장이 들어선다. 19세기말 쿠바는 미국 시장을 장악한 세계 최대의 시가 수출국이었다. 그러나 쿠바 노동자들의 만성적 파업으로 인해 시가 공급이 불규칙하게 이뤄지면서 가격이 급등한다. 이보는 쿠바에서 가장 가까운 탬파(Tampa) 항구권에 편입돼 있다. 철도를 통해 북쪽으로 올라갈 수 있는 육상교통 교차지이기도 하다. 쿠바에서 담뱃잎을 사들여 이보에서 만든 뒤 철도로 미국 전역에 실어날랐다.
민족별 커뮤니티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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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시티의 시가 공장 내부 |
습지였던 이보를 시가 공장으로 개발하자 쿠바에 있던 스페인 출신 노동자들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원래 사탕수수 공장에서 일하던 스페인 노동자들도 찾아온다. 쿠바에 필적하는 최고 품질을 자랑하는 미국산 시가로 자리 잡는다. 사업이 확장되면서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온 노동자들도 일하게 된다. 시가 제조법을 모르기 때문에 스페인 노동자보다 낮은 임금으로 일한다. 그러나 이탈리아인들은 특유의 단결력을 바탕으로 이보 시가 공장을 장악해 간다. 마피아(Mafia)다.
전문경영인으로 유럽에서 독일인들이 건너온다. 이보의 시가를 유럽에 판매하는 중개상 역할도 한다. 시가 공장 안팎에서 식당, 세탁, 가구, 카페에 관련한 일을 돕는 유대인과 중국인도 이보의 일원이 된다. 1900년 이보의 인구는 약 1만6000명에 달한다. 시가 공장을 기반으로 쿠바·스페인·이탈리아·독일·유대인·중국인이 하나로 어울려 살아간다. 이들은 각자의 커뮤니티를 통해 독자적 클럽을 만든다. 당시 주민들이 정부로부터 복지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정부가 돈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가 공장 노동자 대부분이 불법 이주자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스페인 클럽과 이탈리아 클럽은 월급의 5%를 내는 자체 부조(扶助)를 통해 자신들의 의료·교육·도서관 문제 등을 해결해 나갔다. 높은 의자에 앉아 그날의 신문 기사와 중요한 정치·경제 문제를 구술(口述)하는, 시가 공장 안의 ‘학습지도원’도 부조를 통해 고용한다. 이보 시가 공장은 공부하고 노력하는 노동자들의 집산지로 받아들여졌다.
한때 시가 연 5억개 판매
시가 공장의 최전성기는 1920년대 말이다. 한 해에 5억개의 시가를 판매하면서 호황을 누린다. 그러나 1929년 공황이 닥치면서 경기가 급추락한다. 명맥만 유지하던 시가 공장은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완전히 문을 닫게 된다. 이보가 옛 명성을 찾은 건 1980년대부터이다. 폐허가 된 시가 공장을 중심으로 과거의 시설들을 하나씩 복구해 간다. 이보의 번영을 뒷받침하던 시가 판매점과 식당, 카페가 문을 연다. 디즈니랜드 올랜도에 관광객이 몰리면서 이보를 찾는 사람들도 늘어난다. 이보를 끼고 있는 탬파가 발전하면서 젊은이가 즐겨 찾는 휴식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콜롬비아’ 레스토랑은 이보를 찾는 사람이라면 예외 없이 들르는 ‘시가 도시’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보여주는 곳이다. 7번가에 있는 ‘콜롬비아’는 멀리서 봐도 ‘특별한 품격’을 느낄 수 있다. 스페인 남부에서 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색상의 타일 모자이크가 벽면에 장식돼 있다. 남미에 도착한 스페인 신부가 현지 원주민에게 십자가를 보이며 포교하는 장면이 타일로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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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채요리 가스파초 |
미국에서 가장 큰 스페인 식당
‘미국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스페인 레스토랑’. 1905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콜롬비아’는 600개의 좌석을 가진 초대형 레스토랑이다. 단층으로 된 레스토랑이지만, 모국 스페인의 그 어떤 곳에도 뒤지지 않는 질과 양적 수준을 겸비한 곳이다. 현재 3대째 이어지고 있는 ‘콜롬비아’는 남미나 이탈리아 요리가 아닌, 스페인 정통요리라는 점을 강조한다. 19세기 말 세워진 시가 공장의 스페인 노동자들을 위한 음식점으로 출발했기 때문이다. 맛만이 아니라 서비스·분위기·실내장식도 전부 스페인풍으로 연출해 내고 있다. 시가 공장이 최전성기를 달리던 때는 물론 경제공황이 엄습했을 때와 전쟁 중 유령도시로 변했을 때도 자리를 지켰다.
안으로 들어서자 스페인 수도 마드리드에서 봤던 ‘꽉 짜여진’ 서비스가 느껴진다. 손님이 들어서기 무섭게 카운터에서 인사를 하고 자리로 안내를 한다. 곧바로 정장 차림의 웨이터가 나타나 인사를 하면서 음료수 주문을 받는다.
레스토랑 안은 크게 세 영역으로 나눠져 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상징인 플라멩코 쇼를 볼 수 있는 극장용 식탁, 주류를 즐길 수 있는 바와 주변 식탁, 이슬람 문화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파티오(Patio) 안의 식탁이다. 사각형으로 된 실내정원을 의미하는 파티오는 1층 식탁에 이어 2층 난간 곁에도 특실 식탁을 따로 설치해 두고 있다. 때마침 불어온 태풍에다 비교적 이른 시간인 오후 6시에 들렀기 때문에 레스토랑 전체가 한산하게 느껴졌다. 봄·여름 최성수기 때는 올랜도 디즈니랜드에서 몰려온 버스관광단으로 인해 600개 좌석이 전부 매진된다고 한다.
플라멩코 공연 보면서 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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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홍합 요리 |
식탁은 플라멩코 공연이 이뤄지는 무대 바로 옆이다. 관람비로 5달러를 내면, 오후 6시30분부터 시작되는 30분짜리 플라멩코 공연을 볼 수 있다. 먼저 전채요리로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명물인 가스파초(Gazpacho)를 시켰다. 빵·토마토·양파·오이·마늘을 잘게 갈아서 소금과 올리브오일을 섞은 차가운 요리이다. 입에 조금씩 씹힐 정도가 좋지만, 초강력 미국 믹서기를 사용했는지 모든 것이 분홍색 액체로 변해 있다. 토핑된 오이와 양파 조각이 그나마 치아를 즐겁게 만들어준다. 그렇지만 마늘과 올리브 오일을 너무 많이 넣어서 맵고 무겁게 느껴진다. 토마토 특유의 신선한 맛도 찾아보기 어렵다. 담백하고 상큼한 맛의 스페인 음식과는 크게 다르다. 정통 스페인 요리라고 하지만, 입에 대는 순간 ‘멜팅 포트(Melting Pot)’ 미국의 영향을 느낄 수 있다. 미국 땅을 밟는 순간 질보다 양에 초점을 두는 하향평준화의 대표주자가 바로 ‘메이드인 유에스에이 음식’이다.
스페인은 유럽에서는 보기 드물게 차가운 요리가 많은 곳이다. 스페인 요리의 대명사인 타파스(Tapas)의 경우 선택 영역이 찬 것과 따뜻한 것으로 이분화돼 있다. 보통 유럽에서 수프는 따뜻한 것을 의미한다. 아프리카와 접한 스페인은 찬 음식을 즐기는 무슬림 문화의 영향으로 가스파초를 먹게 된다.
에피타이저로 캐리비안 스타일의 삶은 새우와 아보카도를 버무린 음식도 시켰다. 아보카도는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가 산지이다. 캘리포니아의 다양성과 자유를 상징하는 열대과일이다. 최근 한국에서도 즐겨 먹지만, 1970년대 바나나에 버금가는 고급 과일로 분류되는 듯하다. 지방이 너무 많기 때문에 열대림의 새들이 먹으면 소화불량으로 곧바로 죽는다고 한다. 당뇨나 고혈압이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다. 새우와 아보카도의 조화인 줄 알았지만, 위에 마요네즈가 뿌려져 나왔다. 아보카도만으로도 느끼하지만, 마요네즈가 첨가되면서 혀끝이 지방으로 도색되는 느낌이다. 강한 소스나 향신료를 쓴다는 말은 신선하고 예민한 맛에 둔감하다는 의미이다. 강한 맛에 섬세한 맛이 전부 사라지기 때문이다.
스페인보다 히스패닉의 맛
레스토랑에 걸린 고야(Goya) 스타일의 그림과 철로 만들어진 돈키호테 입상에도 불구하고 음식은 스페인보다 히스패닉, 즉 남미 사람들에게 한층 어울리는 듯하다. 히스패닉은 미각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조미료와 인스턴트 음식, 단 설탕과 매운 고추에 찌들리면서 강하고 단 음식만을 찾게 된다. 흑인과 더불어 미국에서 비만 1, 2위를 다투는 것이 히스패닉이다. 강한 음식과 단맛을 찾는 과정에서 미각이 둔화되고, 더불어 적정 식사량을 모르게 되면서 살이 찌게 된다. 일반 히스패닉 음식점보다는 한 수 위지만, 스페인 요리의 정수라는 ‘콜롬비아’라고 해도 예외가 될 수는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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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텔라풍의 후식 |
주요리로 기름에 튀긴 오징어 요리를 주문했다. 새우 요리보다는 한층 가볍게 느껴졌다. 마요네즈와 마늘을 섞은 소스가 함께 나왔지만, ‘감히’ 입에 댈 수가 없었다. 라임을 짜넣어 상큼한 맛을 첨가했다. 99%의 미국 레스토랑이 그러하듯, 오징어 튀김은 냉동제품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자른 크기와 두께가 전부 일정하기 때문이다. 냉동이기는 하지만, 워낙 신선한 튀김용 기름을 사용했기 때문에 바다에서 막 잡아온 오징어 같은 착각에 빠진다. 플로리다의 신선한 해바라기 기름은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콜롬비아 요리에도 변화의 바람
요리의 수준을 파악한 상태에서 메인 음식을 시킨다는 것이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엄청난 양에다가, 위에 무거운 요리가 나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멕시코 스타일이라는 삶은 홍합 요리를 시켰다. 버터와 설탕으로 도배를 한 소스가 홍합 위에 얹혀져 나왔다. 프랑스 스타일인, 화이트 와인과 로즈마리를 넣은 상큼한 홍합요리가 아니다. 함께 시킨 ‘샹그리아(Sangria)’가 유일한 위안이었다. 샹그리아 속에 담겨진 레몬의 신맛 덕분에 미각을 어느 정도 보전할 수 있었다. 원산지인 스페인 포르투갈과 달리, 설탕을 엄청 넣었지만 마요네즈로 뒤덮인 소스보다는 한결 참을 만했다.
음식이 아무리 입에 안 맞는다 하더라도 디저트를 포기할 수는 없다. 가장 유명하다는 포르투갈 카스텔라풍의 후식을 시켰다. 예상했던 대로 후식의 크기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엄청난 크림이 얹혀져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다 먹은 느낌이다. 레드베리와 딸기가 함께 나왔기 때문에 그나마 마지막 입맛을 개운하게 바꿀 수 있었다.
/ 유민호 퍼시픽21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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